아홉 번째 진료
이번 일주일도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낮잠을 안 자고 가능한 자정 전에는 누우려고 했지만 낮엔 늘 멍하고 밤엔 일찍 자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잠들기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현재 내 상태와 내가 원하는 상태 사이에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어디까지인지 생각하며 천천히 노력해보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가능한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보니 일조량이 부족해서 코로나 블루에 시달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모든 것이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서 비타민제도 구매했다. 그리고 별건 아니더라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서 움직이고는 있다. 예전 같으면 무력감에 젖어 이마저도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에는 저번 주에 이어서 그런 깨달음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무엇을 깨달았든, 내 상황이 어떠하든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 처한 '나'다. 그러나 과거에는 나의 환경이 좋지 않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 나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반면 지금은 내가 나를 보고, 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고 자연히 포기할 것은 포기하게 되었다. 이제껏 열심히 노력하고 내 에너지를 쏟았지만 보람이 없고 늘 지치기만 했던 이유는 방향을 잘못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디에 에너지를 쏟아야 하며, 나에게 필요한 것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것을 안 것만으로 이미 정신과에 방문하기 전에 큰 변화가 있었다. 어느 밤, 나는 다음날 출근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도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폰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액정 구석에 표시된 시간이 2:00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니까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폰을 뒤집어 내려놓고 나 자신을 달래기 시작했다. 꼭 잠들지 않아도 괜찮다고,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회복이 될 거라고. 내일 출근해서 일을 해야 하니까, 더 정확하게는 그런 하루를 살아갈 나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자 나는 나 자신과 화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시간이 몇 신데 빨리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라며 스스로를 다그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그게 자기관리인 줄 착각하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그건 나를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내몰았던 것이었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힘들어했지만 나의 우울증과 무기력함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물론 진작 병원을 갔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혼자서 발버둥 치던 때에도 명상, 운동, 공부, 일기 쓰기 등에 시간을 쏟으며 나를 돌아보려고 했다. 다만 자기관리의 본질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오래 걸렸고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그렇게 보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접한 몇 가지 정보만 가지고도 단시간에 굉장히 많은 것들을 깨닫고 그간의 노력이 뒤늦게나마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건전한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노력했고, 겪어 온 일들에도 불구하고 비뚤어지지 않고 올곧은 사람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다 나의 의지 때문이었다. 지금은 정신과에서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선생님께 의존하지는 않는다. 사실 의사가 아무리 유능하고 열심히 한다고 한들 병원에 오지 않는 환자를 고쳐 줄 방법은 없지 않은가. 나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매주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에 가는 나의 의지를 믿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에겐 좋지 않은 습관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 하나는 주변의 분위기를 계속 살피면서 지레 걱정하고 내가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늘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에 예민하고 쉽게 지친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단번에 수긍이 갔다.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나는 늘 긴장상태인 것이다. 이건 내가 부정적인 성향으로 살아온 것과도 연관이 있다. 나는 평생을 내가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최근에는 이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정말 부정적인 사람일까? 나는 오랫동안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그 환경에 대한 당연한 반응일 뿐이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굳어졌지만 그걸 나 자신의 본성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과민반응하지 않도록 연습은 해야겠지만 아마 시간이 걸릴 것이다.
병원을 나선 뒤에 선생님의 말을 곱씹어보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지레 걱정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행동은 내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나는 늘 마음이 떠 있으니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고, 아마 그러니까 독서조차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 말고는 추진력을 얻는 방법을 몰랐던 것과 더불어 과도한 긴장상태가 지속되니 뭘 해도 쉽게 지쳤다. 때문에 노력 대비 많은 일을 할 수 없었고 휴식이 필요했지만 늘 긴장상태이니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그러고나면 무언가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몰려와 또 나를 다그치고 다시 긴장과 과로를 반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문제를 알아가고 있으니 걱정하고 긴장하고 눈치를 살핀다고 달라지지 않는 것들, 내가 놓아도 되는 것, 오히려 잡고 있을수록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놓아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