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진료
오랜만에 아주 바쁜 일주일을 보낸 뒤 병원을 방문했다. 이번 달 초부터 계속 몸이 좋지 않고 낮잠을 많이 자게 됐던 것과 달리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되니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고 밤에 잠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활력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엔 특히 문화생활을 많이 했는데 책, 영화 등을 통해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것들을 만나면서 내 생각이 환기된다는 점이 좋다.
지난번 상담에서 했던 이야기를 곱씹다가 깨달은 것부터 말씀드렸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나를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게 한다고. 그런 태도는 내 일상 전반을 집어삼키고 있었는데, 나는 늘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껴왔으나 의무감은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어떤 일을 시작하지만 그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지 잘할 수도 없었고 잘해도 큰 만족감은 없었다. 오히려 뭐든 할수록 지치니 금방 쉬어야 했고, 쉬면서도 의무감은 사라지지 않고 죄책감으로 이어져서 또 무리해서 움직이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허송세월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움직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미 몇 년 전에 이 부분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놓고 무계획을 계획삼아 반년을 방바닥에 달라붙어 살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스스로에게 쉬는 시간을 허락할 용기를 낸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고 선생님 또한 그렇다고 말해주셨다. 나는 늘 죄책감, 부담감, 열등감, 위기의식 등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여 성장동력으로 써먹었는데 그게 오래 갈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잘 쉬는 방법에 대해 몰랐고 바람직한 성장동력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완전한 문제 해결에 이르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고작 반년 놀았다고 내 인생에 딱히 큰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방바닥에서 등을 떼어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전보다 더 편안해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적어도 전보다는 스스로를 채근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안다. 나는 과하게 노력하면서 스스로를 깎아먹었다. 어차피 당장 내가 할 수 없는 것들,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 무엇보다 내가 바꿔야 할 필요가 없는 것에 신경쓰며 과도한 긴장 상태로 살았다. 그건 아주 오래된 습관이기 때문에 문제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바로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깨달음은 순간일지라도 오랜 수련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깨달음을 붙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았으니 새로운 길로 발걸음을 옮기고 새로운 경향,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선생님은 내가 계속 눈치보고 걱정하고 뭔가 해야 할 것만 같을 때 어떤 기분이냐고 물어보셨다. 일단은 어떤 기분인지 알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럴 때는 내 생각의 중심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문제의 핵심일 것이고, 그러니까 내가 나의 일에 집중하고 효율을 높일 수 없었던 것 같다. 또 불안하고 답답하다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이것도 정확한 묘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앞으로 그런 상황이 됐을 때는 내 기분이 어떤지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동시에 과민반응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달래 봐야겠다.
인간관계를 대하는 자세에 변화가 생긴 것도 말씀드렸다. 나는 늘 우울하고 부정적이고(물론 이건 부정적인 상황에 너무 자주 놓이다 보니 생긴 경향에 불과하고 나의 본성은 아니다) 무기력했던지라 나와 달리 밝고 스스럼없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고 인생의 단 맛만 알 것 같은 사람들이 싫었다. 때문에 자연히 내 주변에는 다소 우울하고 인생의 쓴 맛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남게 되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 중에도 좋은 사람들은 많지만 내 주변이 오로지 그런 사람들로만 채워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내가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 뭘 안다고 섣불리 넘겨짚고 선을 그었을까? 정말 별 어려움 없이 살아와서 구김살이 없는 건지,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고 지금의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지, 그 사람들이 정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내가 열등감에 젖어 무례하게 굴었고 나야말로 그들의 좋은 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시간적 거리만은 지키려고 한다.
내가 이런 것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책, 영화, 미술 등이었다. 그런데 좋은 작품들을 본다고 누구나 이런 것들을 알게 되지는 않는다. 같은 대상을 통해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지는 보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다. 즉, 내가 문화예술을 접하면서 생각을 환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나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담도 큰 도움이 되지만 선생님이 뭘 해줘서라기보다는 내가 병원에 가기 전에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보고, 상담 후에는 꼭 내용을 메모하고, 그중 일부는 이렇게 블로그에도 올리면서 여러 번에 걸쳐 깊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나 스스로를 돕고 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선생님도 나에게 생각이 깊으며 내가 판단하는 것이 대체로 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전문가로부터 이 정도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는 족하다. 때문에 추석 연휴를 앞두고 다음 상담일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도 그리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