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존 카메론 미첼의 영화들: 마음의 벽을 뒤로 하고

밑빠진독Hole in a Jar 2020. 10. 24. 23:55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존 카메론 미첼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내가 본 작품은 <헤드윅>, <숏버스>, <래빗 홀>인데 나는 이 세 편을 관통하는 주제가 '마음의 벽'이라고 생각한다. 세 작품은 전개 방식 또한 동일하다. 영화는 이미 주인공을 둘러싼 갈등이 충분히 고조된 상태에서 시작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가 끝나도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린 결말이 가져다주는 답답함이나 허무함보다는 밑도 끝도 없는 긍정을 느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 갈등 상황을 대하는 마음이 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갈등이 생기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사리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래된 흉터를 보면서 마치 지금도 피가 흐르는 것처럼 아파하는지도 모른다. <헤드윅>은 락스타 토미 노시스를 따라다니는 '헤드윅과 성난 1인치'의 공연으로 시작된다. 그로부터 몇 년 전 헤드윅, 아니 한셀은 미군 남자와 결혼해 동독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시도하지만 이에 실패하면서 '성난 1인치'만 남았고, 동독을 떠났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자신이 있던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렸고, 남자마저 헤드윅을 떠났다. 그리고 이 중에 헤드윅이 돌이킬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미국에서 헤드윅의 새로운 삶은 조금만 기다리면 독일이 통일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을 수도 있었을 문제들에 억지로 손을 댄 결과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혼란과 상실로 가득 찼다. 통일된 독일에서 베를린 장벽은 무너져 과거의 유물이 되었지만 조각나고 기워지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된 헤드윅은 자신을 새로운 베를린 장벽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헤드윅>에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성전환을 하고 어머니의 이름을 빌려 미국으로 건너와 금발 가발을 뒤집어쓴 채 노래하는 헤드윅도, 뮤지컬 <렌트> 티셔츠를 입지만 뮤지컬 무대에 오르는 대신 헤드윅과 공연을 다니는 이츠학도, 헤드윅이 쓴 곡들을 훔쳐서 헤드윅이 지어준 이름으로 락스타가 된 토미 노시스도 자기 자신이 아니다. 이 속에서 헤드윅은 사랑이 모든 혼란을 잠재워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인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은 헤드윅이 자신의 운명적인 연인을 찾아 헤매는 모습과 동시에 자신을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래와 함께 나오는 애니메이션에는 "나를 부정하면 파멸하리라(Deny me and be doomed)"라는 문구가 있는데 나는 이번에 <헤드윅>을 다시 보면서 이 문구가 신에 대한 부정보다는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졌다.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결핍을 밖으로부터 충족하려 든다면 그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헤드윅에게 이것을 알려준 사람은 바로 토미였다. 혼란을 견디지 못한 헤드윅은 노래하던 중에 기타를 부수고 가발을 벗어던지고 가슴을 채운 토마토도 꺼내 팽개친 뒤 무대를 등지고 나간다. 그곳에서 토미는 홀로 조명을 받으며 "사악한 작은 도시(Wicked Little Town)"를 부르고 있었다. "하늘 위엔 공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신비로운 계획도 운명이 정해 놓은 연인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찾지 못한 것도 찾아야 하는 것도 없어." 그 노래를 들으며 헤드윅은 토미와 마주 서서 눈물을 흘린다. 헤드윅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은 이미 갖고 있지만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자기 자신이었다.

 

 

 

 

마지막 무대에서 헤드윅은 토미의 이마에 그려 주었던 십자가를 자기 이마에 그린 채 가발도 진한 메이크업도 화려한 의상도 없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비로소 이츠학에게 자신의 금발 가발을 건네고 본래 모습을 찾도록 놓아준다. 그리고 영화 초반에 등장했던 헤드윅의 문신은 조각난 두 사람에서 이제 하나의 얼굴로 합쳐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헤드윅은, 혹은 한셀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사악한 작은 도시의 어두운 골목을 맨 몸으로 걸어 나간다. 그 앞에 펼쳐진 길은 전과 같이 험난하고 어두울 것이며 도시는 여전히 사악할 것이다. 하지만 길을 걷는 사람이 전과 같지 않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고 믿게 된다.

 

미첼의 문제작 <숏버스>는 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로 영등위와 오랜 갈등을 빚었지만 사실 성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라 수단 정도에 불과하다. <숏버스>는 놀라울 정도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편이지만 오히려 그 속에 꼬인 부분도 없고 숨기는 것도 없기 때문에 놀람은 오래가지 않고 나중엔 '그래, 마음대로 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숏버스>에서는 성보다는 9.11 이후 뉴욕 시민들의 불안감, 하지만 아직은 남아있는 밀레니엄의 희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섹스 테라피스트 소피아는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지만 느끼고 있는 척 남편 롭을 속이고 있다(나중에 밝혀지지만 롭은 소피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피아는 내담자인 제이미와 제임스 커플에게 충동적으로 자신의 고민을 발설한 뒤 그들의 소개로 '숏버스'를 찾아간다. 숏버스는 미국의 일반적인 스쿨버스와 달리 장애가 있거나 특수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타는 버스를 말하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숏버스는 재능 있지만 하자도 있는, 자신이 세상에 딱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는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대안공간이다. 소피아는 그곳에서 여태껏 만나본 적 없는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둘러보면서 오르가즘을 느껴보려는 시도를 해나간다.

 

숏버스의 한 드랙퀸과의 대화에서 소피아는 "뇌와 클리토리스 사이에 장애물이 있나 봐요."라고 말한다. 아마 그 장애물이 바로 마음의 벽일 것이다. 이에 드랙퀸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 장애물로 보지 말고 마법의 회로판이라고 생각해봐요. 거기 담긴 욕망은 온 세상을 돌며 모든 사람을 연결시켜요. 맞는 연결만 찾으면 되죠. 꼭 맞는 회로요. 저 사람들을 봐요. 맞는 연결을 찾고 있죠. 몇몇은 아마도 퓨즈가 나갈 테지만 당신 짝도 있을지 알아요?" 사실 소피아와 롭은 맞는 회로가 아니었다. 소피아는 드랙퀸에게 이제 막 성에 눈뜬 사람을 원한다고 말했고, 영화 후반부에는 롭이 피학 성향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그는 소피아에겐 이에 대해 말조차 하지 않았다. 롭은 소피아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소피아는 롭의 피학 성향을 채워줄 수 없었다. 이런 문제를 직시하지 못했던 두 사람은 서로 맞춰가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지만 애초에 노력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느끼면서도 그 문제 속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서로를 속이며 관계만 유지하는 것이 잘 될 리가 있겠는가.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노력을 그만두게 되었고 숏버스라는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말없이 웃으며 손인사는 나누지만 함께 앉지는 않게 되었다. 마침내 숏버스에는 음악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득하고 소피아가 오르가즘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뉴욕은 불빛으로 물들고 영화가 끝난다.

 

 

 

 

소피아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오지만 사실 오르가즘을 못 느낀다고 해서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오르가즘이 없어도 섹스는 적당히 만족스러울 수 있고 어쩌면 오르가즘은 실제보다 부풀려진 환상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저 소피아 본인이 섹스 테라피스트면서 오르가즘이라는 세계를 모른다는 것이 싫은 것뿐이다. 결말에서 소피아가 마침내 오르가즘을 느낀 것인지는 정확하게 말을 해주지 않지만 아마 느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소피아가 오르가즘의 세계로 진입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세워 놓았던 마음의 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벽을 넘어선 다음엔 그 환상인지 실재인지도 알 수 없으면서 스스로에게 결핍을 느끼게 하고 배우자와의 관계도 위태롭게 했던 오르가즘이 더 이상 소피아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래빗 홀>의 갈등은 어린 아들 대니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그 상처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한 베카는 집을 벗어나거나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어려워하며 남편 하위와의 관계도 삐걱거린다. 그 속에서 베카와 하위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변을 변화시키려 한다. 가령 베카는 대니의 옷을 다른 사람에게 주려 하지만 거절당하자 의류수거함에 내다 버린다. 그다음은 집을 팔고 이사를 가려고 하지만 하위는 아이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베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베카가 집안 환경을 바꾸려 했다면 하위는 베카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베카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노력하고, 다시 아이를 가질 의향도 내비친다. 다만 문제는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아도 그 아기는 대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온 베카는 스쿨버스에 타고 있는 제이슨을 발견한다. 대니가 개를 따라 뛰어가다가 차에 치여 죽었던 날, 제이슨이 바로 그 차를 몰던 사람이었다. 제이슨의 뒤를 밟아 도서관까지 간 베카는 제이슨이 반납한 책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s)』를 따라 빌린다. 그 뒤로도 이어진 미행 끝에 제이슨이 베카에게 먼저 다가가 사과의 말을 건넨 뒤로 두 사람은 공원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제이슨은 베카에게 자기가 만들고 있는 만화책을 소개하며 책은 이 만화책 때문에 조사 차 읽었다고 말한다. 영화 제목인 <래빗 홀>은 말하자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굴과 같은 것이다. 통로 너머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다른 우주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다. 어쩌면 어떤 우주에선 베카와 대니가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우주는 오직 지금 발 딛고 있는 이곳뿐이다. 베카는 만화책을 보면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떠올리게 되는데, 오르페우스가 아무리 에우리디케를 사랑했다 한들 그 어떤 노력으로도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에우리디케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오는 데 실패한 뒤로 줄곧 비탄에 젖어 산 결과 오르페우스는 디오니소스의 여사제들에게 살해당해 에우리디케가 있는 지하세계로 가게 되었다. 우리가 갈 수 없는 우주에 매달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을 잊은 결과는 그런 것이다.

 

 

 

 

베카의 가족은 오래전 비슷한 사건을 겪었다. 바로 11년 전, 베카의 오빠 아서가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것이다. 집을 팔 준비를 하던 어느 날 베카는 엄마와 함께 대니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슬픔에 복받쳐 엄마에게 이 슬픈 마음이 사라지기는 하는지 묻는다. 이어지는 엄마의 대답은 <래빗 홀>뿐만 아니라 미첼의 모든 영화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아니, 11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더구나. 그래도 변하기는 해. 나도 잘 모르지만 슬픔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 같아. 어느 순간이 되면 견딜 만 해지고 슬픔으로부터 기어 나올 수 있게 돼. 그러면 벽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거야. 그리고 가끔씩 잊어버리기도 해. 그리고 다시 슬픔을 찾으면 슬픔은 그 자리에 있어. 그 자리에 그대로. 그건 끔찍한 일이지만 늘 그런 건 아니야. 말하자면 아들 대신 그 마음이 존재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거지. 이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사실 괜찮아."

 

이후 베카와 하위는 주변 환경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자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생일을 맞이한 아이의 선물도 준비하고 정원에서 요리하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누구도 어색하지 않게 손님을 대접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대니에 대해 물어볼 때까지 기다리고, 이야기가 시작되면 애써 슬픔을 숨기지는 않는다. 대화가 끝나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베카와 하위는 둘만 남겨질 것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또 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두 사람은 손을 맞잡으며 영화가 끝난다. 아들 아서를 떠나보낸 엄마의 말처럼 아무리 아픈 상처도 그것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 한 아물기 마련이고 처음 다쳤을 때보다는 덜 아프게 된다. 그래도 흉터는 지울 수 없고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지만 전과는 달라진 몸을 가지고 또 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최근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서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바로 미첼의 영화와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왜 미첼을 좋아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문제는 나 자체보다는 주변 환경에 있었지만 선생님은 나에게 환경을 바꿔보라는 조언은 하지 않았다. 바꾸기도 힘들거니와 바꾼다고 해도 그 환경에 처한 내가 바뀌지 않는다면 나의 괴로움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단이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그로 인한 괴로움은 나의 것이고 그건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깨닫게 되면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상담이 종료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내가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들, 바뀌지 않을 것들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 혹은 누군가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 잘못된 방향으로 하고 있었던 노력 등등을 놓아주는 것이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처한 상황에 가려 보지 못했던 존재, 즉 그 상황에 처한 나 자신을 바로 보고 나와 화해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나를 괴롭히는 내 환경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환경을 뒤로한 채 내 갈 길을 찾아 오늘도 걸음을 옮길 뿐이다. 나를 힘들게 한 것들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힘들다. 상처도 많이 받았고 후유증도 크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상처 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후유증이 남은 나 자신을 이끌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렇게 이 사악한 작은 도시를, 통로를, 밑 빠진 독을, 통과해 나가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