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문라이트: 파르라니 빛나는 외피

밑빠진독Hole in a Jar 2020. 11. 7. 16:09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문라이트>에는 흑인, 마약, 슬럼, 퀴어 등 다양한 소수자적 정체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목표의식이 있었다면 이와 대비되는 주류 사회의 일원을 등장시켰어야 한다. 이를테면 최소한 우범지대는 아닌 곳에서 충분한 보호와 교육을 받은 백인 말이다. 왜냐하면 소수자는 언제나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한국이 아니라 외국인 것처럼, 흑인들만 등장하고 주인공이 마약과 연관된 삶에서 빠져나올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이곳에서 정치적인 입장을 내세우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중, 삼중의 마이너리티는 영화에서 보면 특이해 보일지 몰라도 현실 속의 우리들 또한 저마다의 정체성을 겹겹이 끌어안고 살기 마련이다. 그 정체성들 중 조금 더 중요한 것은 있겠으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그것도 영화나 소설에서 그리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첨예하지는 않고, 그마저도 세월이 지나면서 침식과 퇴적을 반복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문라이트>의 주제는 방어기제다. 흑인이라는 정체성은 말하자면 껍질이다. 껍질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선 그 벗을 수 없는 껍질이 너무나 많은 것을 결정해버리기 때문에 자꾸만 이에 속박당하고 마침내는 스스로도 껍질이 곧 자신인 양 매달리게 되기 쉽다. 그러나 흑인 아이들도 한밤중 바닷가에서 달빛을 받으면 그 피부가 파랗게 빛난다. 이것이 바로 방어기제가 해제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오면 절대로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 같던 검은 외피가 다른 색을 띠며 변화하고, 껍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파랑: 후안과 케빈

 

'리틀(Little)'이라 불리던 어린 소년 샤이론은 별명처럼 몸집도 작고 힘이 약했다. 섬세하고 얌전한 성격까지 더해져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또래들에게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피하고 도망치기 일쑤다. 이때의 샤이론은 그것 말고는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몰랐고, 때문에 자신이 놓인 상황이 주는 상처를 있는 그대로 다 받고 있었다. 그렇게 쫓기고 도망치던 어느 날, 무작정 몸을 숨긴 곳은 마약상 후안의 약창고였다. 후안은 잠겨있던 문을 열고 들어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가둔 샤이론을 밖으로 이끌어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사 주고 집으로 데려갔다. 후안과 테레사의 집에서는 그저 밥을 주고 집에 가기 싫다고 하면 재워주는 등 샤이론은 의사를 존중받고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낯 모르는 후안의 호의에 이렇게나 의지할 만큼 샤이론은 외로웠고 절박했다.

 

 

 

 

후안이 우연히 약창고에서 발견한 샤이론에게 마음을 쓰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속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실 그가 샤이론에게 해주는 모든 것들은 본인이 어렸을 때 받아야 했던 것, 자신의 내면아이에게 해줬어야 하는 것이다. 샤이론이 불쑥 후안의 집으로 찾아온 날, 후안은 아이를 데리고 바다로 나가 수영을 하기에 앞서 먼저 물에 뜨는 법을 가르치며 말한다. "머리에 힘 빼고 내 손에 기대. 내가 잡아줄게. 넌 세상 한가운데 있는 거야." 처음 물에 들어가면 빠질까 봐 무서워서 몸이 굳거나 허우적거리게 되는데 그럴수록 몸은 더 가라앉게 된다. 그러나 물이 나를 다치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몸에 힘을 뺀 채 물에 몸을 맡기면 자연스럽게 몸은 떠오르고 이제 물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후안과 함께 한 수영 연습은 바로 방어기제를 해소하는 연습이었다. 이 연습이 가능하려면 후안은 세상이 위험하지 않으며 위험하더라도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는 믿음을 줘야 하고 샤이론은 그런 후안을 믿어야 한다.

 

이어서 후안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다.  달이 뜨면 맨발로 쿠바의 해안가를 뛰어다니던 후안에게 한 할머니가 말한다. "달빛을 쫓아 뛰어다니는구나.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너도 파랗구나. 이제 널 그렇게 불러야겠다, 블루." 그리고 덧붙인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과연 후안은 그 결정을 잘 해냈을까? 후안이 가책 없이 마약을 팔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약창고에 숨어든 꼬마에게 마음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약을 하는 폴라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샤이론에게 후안은 바닷물 속에서 자기 몸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롤모델로는 적절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후안은 마음을 여는 방법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도 가르쳐줬다.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후안은 총을 손에 쥔 채 나가본다. 그리고 샤이론이 들어와 문과 가까운 의자에 앉는다. 이를 본 후안은 문을 등지고 앉아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누가 몰래 다가올 수도 있으니까 모든 것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범지대에서 마약중독자인 엄마와 사는 샤이론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자 위험한 일을 하는 후안이 해줄 수 있는 교육이었다. 이어지는 후안과의 대화에서 샤이론은 엄마가 싫다고 말하지만 후안은 싫어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자기를 닮은 이 아이에게 후안이 할 수 있는 말은 나도 엄마가 싫었지만 지금은 그립다는 말 뿐이었다. 이윽고 아이는 진실을 마주 보기로 한다. "아저씨 마약 팔아요?" "우리 엄마 마약 하죠?" 후안은 솔직했고 샤이론은 자리를 떠났다. 후안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그것이 후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마찰을 피하기만 하는 샤이론에게서 강인한 면을 발견해 준 사람은 케빈이었다. 샤이론이 또래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순간마다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케빈이 유일했다. 케빈은 당하지만 말고 네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말하며 샤이론을 부추기고 너는 약하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청소년이 되었을 때는 샤이론을 '블랙'이라고 부른다.

 

 

 

 

어느 날 밤바다에 함께 앉은 두 사람은 마리화나를 나눠 피우고 바람결을 느끼며 감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섬세한 감성은 놀림거리가 되는지라 케빈은 이를 대체로 숨기면서 조금쯤은 센 척도 하면서 살고 있지만 비슷하게 섬세한 샤이론 앞에서는 그런 면을 비교적 숨김없이 내보인다. 케빈에게 그런 면이 있기 때문에 샤이론이 눈물이 많으며 때때로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 한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에 대해 샤이론은 바보 같다며 자조하지만 케빈은 "바보 같다곤 안 했어"라며 웃어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오가고, 입을 맞추고, 케빈이 샤이론에게 수음을 해 준다.

 

 

 

 

케빈과의 관계 때문에 <문라이트>에는 퀴어영화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물론 퀴어 요소가 있지만 이 단어는 두 사람에 대해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샤이론에게는 케빈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켜주었지만 롤모델이 될 수는 없었던 후안, 샤이론이 찾아올 때마다 너그럽게 받아주었지만 먼저 샤이론에게 다가갈 입장은 되지 못했던 테레사(그 선을 잘 지킨 점이 현명하기도 하지만), 어울리기 어려운 또래 아이들, 그리고 엄마, 모두 다 샤이론에게는 부족했다. 그런 결핍 속에서 케빈은 서로 마음을 내보이는 유일한 상대였다. 물론 케빈 역시 온전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달빛은 원래 그런 것이다. 달은 차고 기울며 변화를 반복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다가 어느새 다시 빛을 낸다.

 

 

빨강: 폴라와 테렐

 

샤이론이 기댈 곳 없도록 내몰았던 엄마 폴라는 마약중독자이다. <문라이트>에서는 폴라가 마약에 중독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지 않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문제가 숨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불우한 환경과 지옥 같은 마음을 직시하는 것은 너무나 힘겹기 때문에 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자꾸만 마약에 손을 뻗고, 약에 취할수록 문제는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폴라가 마약상 후안이 샤이론을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 본인도 마약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저 샤이론에게 후안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도록 직접 돌보지는 못할 뿐이다. 어느 날 밤, 후안은 자기 구역에 세워진 차 안에 있는 폴라를 발견한다. 겉으로는 내 구역에서 약을 하는 것을 그냥 둘 수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약을 하는 그 사람이 샤이론의 엄마였기 때문에 과민반응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넌 나한테 약 계속 팔 거야?"라는 폴라의 외침에 후안은 대답하지 못한다. "딴 데서 사라고 지껄이지 마. 난 너한테 살 거니까. 근데도 내 아들 기를 거야?" 이미 바닥으로 추락한 폴라는 후안의 바닥도 알고 그 바닥을 어떻게 하면 가장 아프게 후벼 팔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폴라는 수도 없이 샤이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샤이론이 알 수 있도록 충분히 표현하고 보살펴준 적은 없었다. 그리고 샤이론 또한 엄마로부터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체념하고 있었다. 후안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돌아온 샤이론이 TV를 보려고 하자 폴라는 "TV 금지, 책 가져다 읽어"라고 말하는데 샤이론은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들어가 버린다. 차라리 TV를 보고 싶다고 엄마에게 툴툴대는 편이 어린이답고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엔 그 TV마저 없어진다. 팔아서 약값으로 썼으리라는 정도는 샤이론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샤이론은 TV가 있던 빈자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혼자서 큰 냄비에 물을 데우고 욕조에 거품을 풀어 목욕을 한다. 그렇게 샤이론은 한 번도 엄마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고 자신이 필요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런 아이들은 일찍 철들어 필요 이상으로 독립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채울 수 있는 나이가 아닌데도 어른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해결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방치하게 된다.

 

 

 

 

샤이론이 엄마에게 거부당한 기분을 느낄 때마다 나타나는 장면은 복도 끝 폴라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붉은 조명이다. 그 조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샤이론이 후안에게 수영을 배운 날인데, 어린아이가 밤늦게 집에 들어왔는데도 폴라는 샤이론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단지 함께 있던 남자에게 방으로 들어오라고 소리치고 남자가 들어가며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는 게 전부였다. 그다음으로 붉은 조명이 보이는 때는 폴라가 후안과 실랑이를 벌이고 들어왔을 때이다. 분홍색 상의를 입은 엄마가 아이를 향해 소리를 지른 뒤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샤이론도 아무 말하지 않고 등을 돌린다. 파란 달빛이 내리는 바닷가에서와는 달리 엄마의 붉은빛을 받으면 샤이론은 마음을 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완전히 끊어내기는 어렵다. 학교에 다녀온 샤이론에게 폴라는 올 사람이 있으니 나가서 자라고 말한다. 미성년자인 아이에게 할 말이 아닌데도 샤이론은 군말 없이 테레사의 집에서 신세를 진다. 테레사는 또 마음을 다치고 와서 풀이 죽은 아이에게 저녁식사를 챙겨주고 "고개 숙이지 마. 내 규칙 몰라? 이 집에선 사랑과 자부심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침구정리를 잘하라는 잔소리도 잊지 않는다. 이는 폴라가 가르쳐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샤이론을 맞이하는 엄마는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하다. 신경질적으로 온 집안을 뒤지더니 샤이론에게 와서는 테레사가 준 용돈을 빼앗으며 말한다. "그년이 아니라 내가 네 혈육이야!" 테레사를 "가짜 엄마"라고 칭하며 진짜 엄마로서의 자기 위치를 지키려 하지만 엄마의 역할은 전혀 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폴라는 후안이 살아있을 때는 후안으로부터 약을 사고, 후안이 죽은 뒤로는 후안의 파트너였던 테레사가 아이에게 준 돈으로 약을 산다.

 

폴라의 사랑한다는 말은 나를 사랑해 달라는 갈구에 가깝다. 샤이론이 밤바다에서 케빈과 함께 있다 돌아온 날, 폴라는 샤이론에게 말한다. "이젠 날 사랑하지 않지? 내겐 너뿐이야. 네겐 나뿐이고(You don't love me no more. You are my only, I'm your only)." 그런데 이 말은 틀렸다. 'only' 다음에는 명사가 와야 한다. 샤이론은 '유일한 아이(only child)'일 수는 있겠으나 유일함 그 자체는 아니다. 그 허황된 유일함에 매달릴수록 폴라는 공허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폴라는 샤이론이 성장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저지하고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기 옆에 붙어있도록 붙잡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선이 없었다. 약에 취해 몽롱한 폴라는 그 선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학교에는 샤이론과 정반대의 인물이 있었다. 덩치 크고 늘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위압감을 조성하는 테렐은 늘 샤이론에게 시비를 건다. 게이이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놀리고 성적 모욕을 주는 것에 대해 샤이론도 한 번쯤 강하게 맞서고 싶은 눈치이지만 번번이 뒤로 물러난다. 케빈 역시 테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샤이론보다도 더 눈치를 보며 저항하지 않는다. 그런데 늘 먼저 시작하는 것은 테렐이다. 테렐은 게이에겐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늘 먼저 샤이론을 쳐다보고, 테레사와의 사이도 알고 있다. 이처럼 센 척하는 테렐의 모습 뒤에는 분명 무언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케빈과 같은 감수성이 있거나, 혹은 샤이론처럼 게이이거나 적어도 샤이론과 친해지고 싶었거나. 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기 때문에 위악(僞惡)으로 자신을 휘감고 다니며 남을 찍어 눌러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런 테렐은 첫 등장부터 빨간색 티셔츠를 입었고, 이후로도 늘 빨강이 들어간 운동화를 신는다. 붉은 조명을 등진 폴라처럼 테렐은 샤이론이 방어막을 세우게 만드는 사람이다.

 

결국 테렐이 학교를 그만둔다고 말한 날, 사건이 벌어진다. "내가 누굴 찍으면 네가 패는 거야." 그게 테렐의 게임이고 지기 싫고 약해 보이기 싫은 케빈은 거부하지 못했다. 테렐이 찍은 사람은 당연히 샤이론이었다. 어린 시절 케빈은 샤이론에게는 "네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케빈은 샤이론의 강한 면과 섬세한 면을 두루 볼 수 있을 만큼 관찰력이 뛰어나고 소외된 친구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 만큼 용기 있었지만 힘센 친구 앞에서는 적당히 비겁하기도 한 소년이었으니까. 케빈은 테렐의 눈치를 보며 샤이론에게 주먹을 날리고는 일어나지 말라고 속삭이지만 끝까지 맞아줄 작정인 샤이론은 기어이 일어나버린다. 그게 샤이론의 방식으로 케빈에게, 또 테렐에게 맞서는 것이었고 결국 샤이론은 테렐 패거리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만다.

 

 

 

 

지저분한 욕실, 샤이론은 얼음물에 얼굴을 담근다. 핏물이 흐르고,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본다. 그다음 학교로 가서 망설임 없이 목표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의자를 집어 들어 테렐을 후려친다. 테렐은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 센 척하는 테렐도 사실은 고작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놈이었는데 그 한 방을 날리지 못해 참 오래도 속앓이를 했다. 케빈이 했어야 하는 행동을 대신 한 대가로 샤이론은 학교에서 체포되었고, 케빈은 샤이론이 끌려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다. 그리고 샤이론도 케빈을 보며 이들의 청소년기는 끝나버린다.

 

 

검정: 샤이론

 

 

 

소년원을 나온 뒤 마약상이 된 샤이론은 이제 제법 노련한 업자 티가 난다. 케빈이 부르던 별명인 '블랙'으로 불리게 된 그는 근육질에 각종 금붙이를 휘감고 운전할 때는 비트가 강한 힙합 음악을 크게 틀어 놓는다. 대시보드 위에는 후안이 그랬듯이 금색 왕관 장식품이 있고 때때로 후안처럼 검은 두건을 쓴다. 문을 등지고 앉는 법이 없었던 후안처럼 그는 자신을 지킬 줄 알게 되었고 적당히 센 척도 할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속엔 여전히 '리틀' 샤이론이 살아있다. 샤이론은 여전히 꿈에서 엄마를 본다. 붉은 조명을 등진 폴라는 "쳐다보지 마!"라며 소리를 지르고 샤이론은 잠에서 깨 얼음물에 얼굴을 담근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가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던 후안과 달리 붉은 조명을 받은 채 자신을 노려보는 엄마, 샤이론에게 엄마는 악몽이다.

 

밤중에 샤이론은 두 번의 전화를 받는다. 첫 번째 전화는 폴라, 샤이론은 엄마의 번호를 이름으로 저장해 두었다. 두 사람은 서로 대화하지 않고 폴라의 음성을 배경으로 샤이론은 운동을 하고 세수를 한다. 두 번째 전화는 케빈이었다. 잠결에 엄마인 줄 알고 전화를 받은 샤이론은 그날 이후 처음으로 케빈의 목소리를 들었다. 케빈은 뒤늦은 사과를 한 뒤 요리사가 되었다는 근황을 전하며 식당으로 샤이론을 초대한다.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애틀랜타에서 마이애미로 향한 샤이론은 먼저 폴라가 있는 재활원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몇 마디 말로 근황을 나누지만 분위기는 서먹하기만 하다. 폴라는 마약상이 된 아들을 걱정하지만 결국 샤이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언성을 높이게 되는데 어릴 때는 한 번도 엄마 앞에 맞서지 못했던 샤이론이 드디어 '당신은 내 인생에 충고할 자격이 없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폴라는 결국 재활원까지 와서야 샤이론에게 사과를 건넨다. "난 잘못 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망쳤지. 나도 알아. 하지만 네 마음은 나처럼 검지 않아. 사랑해 샤이론. 정말이야. 사랑한다, 우리 아들. 넌 엄마를 사랑하지 않지. 사랑이 필요할 때 못 줬으니 이해해. 넌 엄마를 사랑하지 않지만 내가 사랑한다는 건 알아줬으면 해." 샤이론의 악몽 속에서 "쳐다보지 마!"라고 소리친 것은 자신의 검은 마음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말이었을까.

 

샤이론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엄마를 안아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에 대해 두 사람이 화해했다거나 샤이론이 엄마를 용서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화해나 용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폴라는 어린 시절 샤이론에게 필요했던 사랑과 보살핌을 줄 수 없는 사람이었고 이제 샤이론은 성인이고 자기 앞가림을 스스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치 않다. 더구나 폴라가 재활원을 집 삼았고 샤이론은 방문자증을 발급받아 재활원 정원에서나 잠깐 만날 수 있는데 두 사람이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샤이론은 드디어 언성을 높여 두 사람의 문제를 직면했으며, 폴라의 뉘우침은 폴라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지만 샤이론에겐 충분하지 않은 것이니 더 이상 서로에게 남아있는 것이 없다. 결국 샤이론은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엄마라는 문제 자체를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엉켜버린 실타래가 있을 때 모든 매듭을 다 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도저히 풀 수 없는 어떤 매듭은 풀지 않은 채 내버려 두거나 경우에 따라선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목표는 실타래를 풀고 감길 반복하면서 미로를 헤쳐나가는 것이지 실타래를 예쁘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니까.

 

샤이론은 다시 차를 몰아 케빈의 식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바다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파란 하늘과 달빛이 보인다. 샤이론은 차에서 내려 머리를 매만지고 식당으로 들어가 말없이 앉았고 케빈이 샤이론을 알아보면서 두 사람은 오랜만에 인사를 나눈다. 케빈 앞에 선 샤이론은 예전처럼 말수가 적어졌고 요리사가 된 케빈은 주방에서만은 쿠바인 흉내를 낸다. 쿠바에서 온 후안처럼. 후안과 테레사 이후 샤이론에게 먹을 것을 준 사람은 케빈이 처음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샤이론은 마약상이 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며 자조하지만 케빈은 단호하게 답한다. "그건 네가 아니야, 샤이론."

 

 

 

 

식당 문을 닫고 케빈의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샤이론에게는 또다시 밤바다가 보인다. 그 바다는 실제 바다가 아니라 어린 시절 두 사람의 추억이다. 집에서도 케빈은 샤이론에게 재차 묻는다. "넌 누구야, 샤이론?" '블랙'은 케빈이 붙여 준 별명이지만 오늘날 그 이름으로 불리는 샤이론은 케빈이 생각한 모습은 아니었다. 샤이론은 소년원을 나와 애틀랜타로 가서는 더 강해지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바꿨다고 고백한다. 운동으로 근육을 키우고 옷차림이며 음악취향까지 모두 새롭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케빈의 고백 역시 비슷했다. 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못하고 되는 대로 살다가 감방도 다녀왔다. 여전히 보호관찰 중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감방에서 배운 재주로 직업도 가졌고 아기도 있고, 삶이 있다. 약간의 정적, 샤이론은 다시 입을 연다. "날 만져준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너 하나였어." 다시 시선이 교차하고, 달빛을 받은 듯 '블랙'이라는 외피를 벗은 샤이론의 모습이 나온다. 어릴 때 바닷가에서처럼 샤이론은 케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케빈은 샤이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샤이론의 오랜 그믐이 끝났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어린 샤이론의 뒷모습이 보이고, 샤이론이 고개를 돌리며 영화가 끝난다.

 

누구에게나 방어기제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과해지면 자신을 상처 입히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게 만든 상황보다도 방어기제 그 자체가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 폴라에게는 마약, 테렐에게는 위악이 그것이었다면 케빈은 웃는 낯으로 상황을 적당히 무마하려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후안은 뭐였을까? 자신과 닮아있지만 아직은 연약한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어른 행세를 하며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는 것이겠지. 그리고 어린 샤이론은 침묵을, 성인이 된 샤이론은 완전한 가면을 사용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직면해야만 하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도록 눈을 가린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단단한 외피도 달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오면 우리는 스스로를 옭아매던 것을 벗어던지고 그 안에 있는 진정한 자기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이 왔을 때 눈을 뜨고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샤이론은 후안이 말했던 "결정"을 다시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검정색 잉크를 맑은 물에 떨어뜨려 보면 그 안에서 생각보다 많은 색깔들이 풀려나온다. 어떤 잉크는 희석하면 푸른빛이 돌기도 하고 어떤 잉크는 붉은색이 보이기도 한다. 검정은 색의 3원색을 모두 섞었을 때 나오는 색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는 아주 자연스럽다. 이처럼 오늘의 샤이론 역시 많은 것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까지 그가 겪어 온 사람과 사건들,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감정들이 뒤섞여서 오늘날의 '블랙'이 된 것이다. 비록 케빈이 처음으로 '블랙'이라고 불렀을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해도 샤이론은 테렐처럼 남을 짓눌러가며 센 척을 하지는 않았고 경험한 적 없는 무용담은 늘어놓지 않았다. 엄마처럼 약물이나 알코올에 의존하지도 않았으며 그 대신 운동으로 스스로를 단련했다. 말수도 적고 수줍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환골탈태하기 위해 노력을 선택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케빈이 꿰뚫어 본 '블랙'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