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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밑빠진독Hole in a Jar 2021. 1. 1. 12:42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은 시작과 끝이 같다. 이는 결말을 먼저 보여준 다음에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똑같은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르윈의 삶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는데 나는 후자가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가스등 카페에서 노래하는 무명가수 르윈 데이비스, 추운 겨울에 코트 하나 없고 거처도 마땅치 않아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소파 신세를 진다. 함께 노래하며 레코드를 냈던  친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혼자서 낸 레코드 역시 재고 신세다. 심지어 커플 진과 짐의 집에서 종종 신세를 지면서 진과 잠자리를 한 뒤 임신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나마 없는 돈을 쥐어짜내 진의 중절수술 비용을 대는 것이 르윈이 보여주는 최대한의 성의이지만 병원 예약 날짜는 제대로 기억도 못한다. 게다가 르윈은 다른 사람과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있는데도 진과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그러니 진이 르윈을 루저 취급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음악 활동으로 도저히 먹고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르윈의 최후의 보루는 항해사 자격증이다. 아버지도 선원이었고 르윈 또한 배를 탔지만 그 삶이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막막해졌을 때는 배를 타기 위해 항해사 조합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연체한 회비 148달러를 내지 않으면 항해를 할 수 없다는 말에 가진 돈을 다 털어줘야 했다. 그다음 르윈은 자격증을 찾기 위해 누나의 집을 방문한다. 르윈의 누나는 르윈의 항해사 자격증을 포함한 오랜 물건들을 모은 상자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돌아오는 말은 "버렸다"는 것이었다. 일전에 방문했을 때 누나가 상자를 보여줬을 때 르윈은 뭐가 있는지 자세히 확인하지도 않고 홧김에 다 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항해사 자격증 재발급은 85달러, 연체한 회비는 환불 불가, 85달러가 있을 리 없는 그는 돈은 돈대로 날리고 배를 탈 수도 없게 되었다. 르윈이 항해사 자격증을 인생의 보험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잘 관리했어야 하고 아무리 음악으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배를 타는 것만은 하기 싫었다면 다시는 항해사 조합에 발걸음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렇게 책임감 없는 인간이어도 르윈에게는 늘 약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지인이 공연이나 녹음할 기회가 생기면 꼭 연락을 준다. 그리고 르윈 역시 그런 기회들을 열심히 쫓아다니지만 먹고 살기 충분할 만큼 돈이 되거나 유명해지지는 않을 뿐이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갈 곳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연락하는 곳은 골파인 교수네 집이다. 교수 부부는 늘 있는 일인 양 르윈을 받아주고 아침에 알아서 나가라며 집을 비웠다. 그런데 르윈이 집을 나설 때 고양이가 따라 나오면서 골치아픈 여정이 시작된다. 문은 이미 닫혀 잠겨버렸고 골파인 교수는 연락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으나 여기저기 전전하는 신세에 고양이를 잘 돌볼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기어이 고양이를 잃어버리고 만다. 간신히 길에서 도망간 고양이를 찾아 골파인 교수의 집으로 데려가지만 알고 보니 색깔만 같은 엉뚱한 고양이였다. 그래도 르윈은 이왕 데려온 고양이를 버릴 수는 없었는지 데리고 다니지만, 자신의 상황이 나빠지자 끝내는 고양이를 버려두고 길을 떠날 만큼 책임감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도 르윈은 갈 곳이 없어지면  또 골파인 교수네 집으로 가고 골파인은 르윈을 따뜻하게 맞이해준다. 그런데 그 집에는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고양이가 있었다! 제 발로 집을 찾아온 것이다. 이때 알게 된 고양이의 이름은 율리시스, 바로 기나긴 여정 끝에 집으로 돌아오게 된 영웅 오디세우스였다.

 

<인사이드 르윈>의 처음과 끝은 정장을 입은 신사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장면이다. 그 이유는 전날 르윈이 가스등 카페에서 노래하는 어떤 여자를 조롱하며 분위기를 흐렸기 때문인데, 노래가 별로라서도 아니고 그저 항해사 협회에 돈만 털어주고 배는 못 타게 된 다음이라 심사가 뒤틀려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신사는 여자의 남편이었다.

 

 

그렇게 지인들의 거실 소파에서 신세를 지고, 기타를 들고 이리저리 떠돌고, 어떤 날은 진상을 부리면서 르윈의 삶은 반복된다. 뮤지션으로 성공하는 것은 노력만 가지고는 안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적어도 골파인 교수의 집에서 율리시스를 다시 만난 다음날 아침 르윈이 집을 나서면서 재빨리 발을 뻗어 따라 나오려는 율리시스를 막았던 것처럼 작은 몸짓으로도 바꿀 수 있는 것이 분명 있다. 자기 기분이 엉망일 때는 조용히 카페를 나섰다면 신사에게 보복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고, 짐을 보관하고 있는 누나에게 홧김에 소리치지 않았다면 항해사 자격증도 제자리에 있을 것이다. 율리시스처럼 어떤 일은 일부러 손대지 않아도 제 자리를 찾아가지만 팔리지 않는 르윈의 레코드처럼 어떤 일은 딱 나가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희망만이 주어진 채로 끊임없이 반복된다. 르윈은 그 굴레를 끊어버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