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종료 후, 내 안의 선생님 찾기
정신과 상담을 종료한 지 반년이 지났다.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내 일상은 큰 변화가 없다.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가벼운 운동을 하며 수면위생 개선에 힘쓰고 있으나 쉽지 않고, 기타 생활수칙을 정해 매일같이 실천하며, 나의 감정을 잘 살피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고, 내가 처한 환경으로부터는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그동안 나의 우울과 불안에도 고저가 있었다. 다시 상담 예약을 잡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때도 있었고 이만하면 괜찮다 싶은 때도 있었지만 아직은 병원에 가지 않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기거나 힘들 때마다 병원으로 달려가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큰 상처가 생기면 봉합해야 하지만 그런 사고는 자주 일어나지 않고 보통은 연고와 밴드 정도로, 혹은 그것도 없이 해결이 가능하다. 그럼 관건은 그 상처를 보고 상태를 파악하는 능력일 것이고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 자아성찰에 매달렸다. 그리고 반년 동안 아직은 봉합이 필요한 상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병원에 가는 대신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이었는데 만약에 상담을 간다면 선생님께 뭐라고 말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내 안의 선생님 찾기'라고 부른다. 우리는 살면서 만난 사람들의 조각을 갖고 살아가는데, 그렇다면 나도 선생님의 조각을 갖고 있을 터이니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했던 것들을 이젠 스스로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진료실에서 상담받는 상상을 할 때마다 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상상 속의 선생님은 별 말이 없으셨다. 선생님은 상담은 내담자가 이끌어가는 것이고 의사는 도움만 주는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 모의상담을 잘하고 있는 것이다.
우울증의 대표 증상 중에는 반추가 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 감정을 부정적으로 곱씹으면서 이에 고착되어 있느라 정작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반추를 종종 하는데, 어느 날 어차피 생각을 틀어막을 수 없는 한 반추는 할 건데 이왕에 하는 거라면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바른 자세로 앉아 호흡을 고른 뒤, 과거의 사건을 상세히 되짚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나의 기분과 생각, 그것이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렇게 선생님 흉내를 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을 반복할수록 상담을 받을 때는 몰랐던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왜 자꾸 나를 잡아채며 앞서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라 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나는 1인칭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을 3인칭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관찰자는 나다. 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누구와도 다른 나만의 감정을 느끼며 그 감정에 대해서는 타인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내가 처한 현실이 버거울 때, 나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발을 붙이지 못했고 정신은 이곳저곳을 부유했다. 몸을 빼내지 못한다면 정신이라도 빼내야 할 것 같았다. 마치 유체이탈과도 같은 상태였다. 그 버거운 현실을 온전히 겪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선생님은 힘들더라도 내가 처한 현실을 똑바로 보고 온전히 겪어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걸 깨달은 이유는 이제 드디어, 그 현실을 겪어낼 힘이 붙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병원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유체이탈을 해선 안 된다고, 현재 상태에서 어떻게든 내 자율성을 확보하고 오늘을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논리적인 사고 과정에서 나온 답안 같은 것이었고 현실의 내가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나는 땅에 발을 붙이고 설 수 없었기 때문에 지지대를 마련하려고 병원에 갔던 것이었다.
내가 블로그를 공개로 돌리고서도 글로 쓸 수는 없었던 부조리한 현실들을 병원에서 말하게 되었을 때조차 나는 선생님 앞에서 울지 않았다. 드디어 형언할 수 없었던 것이 형언할 수 있는 것이 되었고 이제는 감당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과정을 잘 견뎌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 나는 아주 훌륭한 내담자였다. 그런데 정작 상담을 종료한 뒤로 나는 전에 없이 울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청소년 시절을 떠올렸다. 무언가 힘들고 막혀있는 느낌은 들지만 원인은 알 수 없었던 그때는 차라리 울기라도 하면 해소가 될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어떻게 해야 울 수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정작 더 어린 시절의 나는 눈물이 많은 아이였는데도. 눈물이 많다는 것은 특별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그냥 성향인데 이상적으로는 타고난 성향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이를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야 하는지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것을 완전히 눌러버렸지만. 어쩌면 그게 유체이탈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뒤늦게 누름돌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본래 성향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으나 나는 어릴 때 익힌 것이 빈약하니 미숙할 것이고 오랜 습관을 일시에 청산할 수 없으니 때때로 누름돌을 다시 사용하게 될 것이다. 전과 같은 방식과 빈도는 아니겠지만.
선생님께 나는 애늙은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는데 정신연령은 신체나이와 일치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애늙은이는 진정한 성숙함과는 거리가 멀고 어린애가 어른, 심지어 노인 행세를 하느라 무리하고 아이로서 경험해야 하는 것들을 온전히 겪지 못하게 될 뿐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내 진짜 나이를 찾아가겠다고 했었다. 어릴 때 하지 못했지만 늦게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은 할 것이고, 영영 떠나가버린 것들은 내 마음에서도 놓아주겠다고. 어릴 때 흘리지 못한 눈물을 뒤늦게 흘리면서 나는 선생님께 한 말을 지켰다. 우는 방법조차 잊어버렸던 애송이는 울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나의 감정을 마주보고 풀어내고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 알게 된 것도 큰 성과이긴 하지만 일순간의 깨달음에 그쳐선 안 된다. 오랜 시간을 들여 연습하며 깨달음을 붙잡고 내 삶에 녹아들게 해야 한다. 그래야 깨달음은 나의 지혜가 되고 후일 잊어버리게 되더라도 잃어버리지는 않는 나의 자산이 된다.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면서 냉소주의가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남들에겐 너무 당연하지만 나에겐 주어지지 않았던 것들, 의사를 제외한 누구에게조차 설명할 방법을 모르겠는 사건들, 온전히 감당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었던 시간들 속에서 나는 냉소에 휩싸여 있었다. 어차피 주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단념하겠다는 생각은 진짜 단념이 아니었고 오히려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의식하지 않는 척을 할 뿐, 그건 갈망에 가까웠다. 인생의 단 맛만 아는 것 같은 사람들이 싫다는 말로 타인을 넘겨짚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는 고립되었다.
지금은 달콤한 표면 속에도 때로는 검고 쓴 것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인정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들을 나는 오래도록 갈망해왔지만 그건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도, 나도 우연히 갖거나 갖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소리친 적도 있지만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얻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의 복이라고 인정하고 웃어주려 한다. 물론 양쪽 입꼬리를 모두 올려서.
냉소주의는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와 비슷하다. 내 손이 닿지 않아 먹을 수 없는 그 포도는 시고 떫은 게 아니라 아주 달고 맛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 포도를 차지할 사람이 부럽다. 그러나 그 포도는 내 것이 아니다. 그걸 인정하고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오랫동안 높은 곳의 포도를 바라만 보다가 고개를 숙이길 반복했던 나를 안타깝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정면을 본다. 내 손이 닿는 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찾는 것이다. 밑 빠진 독을 밀어젖히자 그것은 터널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그 터널 밖에는 관목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