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진료
병원에 갈 때는 텀블러에 물을 준비해야 한다. 말을 많이 하게 되니까. 사람들은 정신과에서 상담할 때 우는 경우도 많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던데, 나는 일단 뱉기 시작하면 참 잘도 한다. 꼭 정신과가 아니더라도 병원은 아프고 힘든 이야기 하러 가는 곳이라 마음이 편한 장소는 아닌데도 말이다. 이 블로그 첫 번째 글에 나는 내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고 썼는데 그렇지만도 않은가? 그래도 말을 하다 보면 감정의 동요는 일어나서 목소리가 흔들리고 속에서 울컥울컥 하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내가 괴롭고 슬퍼서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돌봐주지 못하고 내 편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반응이고, 그간 제 때 해결하지 못했던 해묵은 감정들이 올라와서 감정의 배출구에서 병목현상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저번에는 나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주로 현재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먼저 꿈 이야기부터 시작했는데 일주일 동안 눈을 뜨자마자 꿈 내용을 적어두려고 노력은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똑같지만 중요한 것은 그 꿈을 겪는 나의 반응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꿈을 아주 많이 꾸는 편이었다. 꿈만 꾸다가 밤이 다 지나가버려서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도 헷갈리고 자고 일어나도 늘 피곤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내가 꿈을 꿨는지 안 꿨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꾸긴 했겠지만 그 때문에 그다지 시달렸다는 느낌은 아닌 것이다. 막 자다 깨서 비몽사몽중에 남겨 둔 메모 중 하나는 "????? 꿈을 꾸긴 한 것 같은데???????"였다.
병원에 갈 결심을 하고부터 실제로 병원에 가기까지의 기간 동안 큰 깨달음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인사까지 블로그에 읊을 마음의 준비는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얼버무리겠다. 어쨌든, 그런데 그 깨달음이 아주 새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들은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퍼즐 조각들을 제각기 따로 보고 있었지, 이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야 그 조각들을 짜 맞출 수 있게 되었다. 힘들어하는 동안 끝없이 자아성찰을 하며 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찾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허사는 아니었다. 조각을 찾고 비슷한 색깔끼리 모아서 그림을 맞출 수 있게 정리하는 중이었던 거니까.
그 퍼즐을 맞췄다고 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이 나아졌냐 하면 그렇지 않다. 퍼즐도 대략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있게 됐을 뿐이지 완전히 다 맞춘 것도 아니다. 환경 자체를 개선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어떤 환경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바꿀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작업부터 한 다음 바꿀 수 없는 것은 마음에서 놓아주는 대신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나아갈 수밖에. 라인홀트 니부어의 기도문을 필사까지 해 가며 읽었던 때가 있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길 바랐으나 이 모든 것이 허사인 것인지 내가 기도문을 곡해했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내 상황을 바로 보니 이제는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 또한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서는 약도 주지 않았건만 내가 진실을 바로 알게 되고 묵은 감정들을 다시 꺼내 바라보고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여전히 잠은 얕지만 전에 비해서는 일어나는 것이 괴롭지 않고, 걷잡을 수 없는 우울감에 휩싸이지도 않고, 내 발밑에서만 중력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은 절망감도 들지 않는다. 무기력하게 살아 온 세월이 길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에너지가 샘솟지는 않지만 아주 늘어지지도 않는다. 나는 이 블로그에 올라가는 글 말고도 많은 것들을 적어두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들을 끄집어내 정리하면서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상황을 바로 보려고 하고 있다. 남들이 요즘 뭐 하고 사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는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무기력하다면 이마저도 못 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선생님은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내 말을 듣고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계속해서 물어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크게 막히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같은 것들은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만 그건 하나씩 해보면서 찾아가면 될 일이고, 큰 방향은 잘 잡은 것이다.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종종 "그렇지!"라고 말했다. 내가 우울해하는 이유를 찾고 개선하려는 노력들이 허사 같았던 날들은 많았지만 아무리 오래 걸려도 나는 바른 길을 스스로 찾은 것이다. 그래도 이 길을 혼자 걷기는 어려우니 병원에서 그만 오라고 할 때까지 다녀 볼 생각이다. 아무리 깨닫고 좋아졌다 한들 내가 힘들어한 시간이 너무나 길기 때문에 어떤 것이 우울증의 증상이고 어떤 것이 내 본래 성격인지조차 구분되지 않고, 사고방식도 균형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우울과 불안에 휩싸여 있던 나를 발굴해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내야 한다. 선생님과는 그 작업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있는 동안 나의 시간은 뒤틀리고 당연히 가까워져야 할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랬던 나의 시간이 비로소 순행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