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과 관계맺기
옛날에는 대학에 들어가거나 첫 직장을 갖게 되면 만년필을 선물 받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노트북이나 태블릿 같은 전자기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자연히 어른으로부터 만년필을 받거나 사용법을 배우는 일은 없어졌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아날로그보단 디지털이 익숙한 젊은 세대들이 만년필을 쓴다는 것은 참 귀찮고도 특별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먼저 만년필을 구매하는 것부터가 까다롭다. 브랜드 매장이나 교보문고 같은 큰 서점이 아니면 오프라인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들어서 시필을 하지 못하고 온라인의 정보만 믿고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엔 너무 비싸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델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아주 추천하는 방법은 아니다. 조금 비싸더라도, 남들이 좋다고 하는 후기가 별로 없더라도 내 마음에 꼭 드는 것이어야만 한다. 아무리 저렴한 것을 골라도 일반 펜보다는 꽤 비싼 데다가 잘만 쓴다면 평생을 쓸 수도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또 마음에 들어야 자주 꺼내보고 잘 관리하면서 사용하게 된다는 이유도 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비싼 펜을 사는 것도 좋지 않다. 펜을 편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모시고 다니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용법도 일반 펜은 구매해서 바로 쓰면 끝이지만 만년필은 그렇지 않다. 먼저 펜을 열어서 컨버터를 꽂고 펜촉을 잉크병에 담가 잉크를 충전한다. 처음 사용할 때는 동봉된 카트리지부터 쓰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엔 잉크가 피드를 거쳐 펜촉까지 흘러내릴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 펜을 쓰다가 잉크가 다 되면 획이 가늘어지거나 건조하게 끊어지는데 이때 억지로 펜을 계속 사용해선 안 된다. 마른 펜촉이 종이를 긁게 되면서 펜에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약간 남아있는 잉크가 아깝더라도 펜을 분해해서 물에 세척해야 한다. 오래 사용할 물건을 오랫동안 잘 쓰기 위해서 잉크 몇 방울은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컨버터를 이용해 물을 빨아들이고 다시 빼내는 것을 반복하며 맑은 물에 잉크가 퍼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만년필을 사용하는 재미 중 하나이긴 하나 생각보다 깨끗하게 세척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펜촉을 담근 물에 더 이상 잉크가 녹아 나오지 않는다면 이제 물기가 마를 때까지 그늘에 두고 기다린다. 때때로 세척을 하지 않고 잉크만 다시 충전하는 경우가 있는데 펜을 관리하는 데는 좋지 않다.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세척해야 펜을 오랫동안 잘 쓸 수 있다. 잉크가 충전된 채로 오랫동안 펜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안에서 잉크가 말라붙으면 나중에 쓰려고 해도 잘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장기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면 깨끗하게 세척하고 말려서 보관해야 한다. 제일 좋은 관리법은 펜을 방치하지 않고 자주 사용하여 한 번 충전한 잉크가 너무 오랫동안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관리하며 사용해도 불상사는 일어난다. 가장 흔한 일은 펜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보통은 약간의 흠집 정도로 끝나지만 때로 잉크가 튀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이건 닦으면 되지만 어딘가가 깨지는 것은 문제가 크다. 펜촉이 휘어지기라도 하면 본인이 어지간한 고수가 아닌 바에야 바로 전문점에 수리를 맡기는 편이 낫다. 물론 대부분의 브랜드가 펜촉만 따로 판매하고 있지만 새 펜촉을 끼우게 되면 사용자는 바로 알 것이다. 이전에 쓰던 그 펜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펜을 커피에 완전히 담근 적이 있다. 검지와 중지에 펜을 끼운 채 빨대로 커피를 휘젓다가 펜을 놓쳐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건 내 첫 만년필이었고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뜨거운 커피가 아니라 아이스 카페라떼였다는 것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였으면 조금 더 좋았겠지만... 나는 사색이 된 채로 펜을 건진 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커피를 카운터에 반납하고(일반 볼펜이나 연필을 빠뜨렸으면 그냥 건지고 마셨겠지만 만년필에선 잉크가 꽤 많이 빠져나왔을 것이다) 집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물에 몇 번씩 헹구고 잘 닦았더니 다행히 펜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는 펜을 쥔 채로 빨대로 음료를 휘젓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만년필은 사용자의 필기습관에 맞게 길이 든다고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사용자가 만년필에 길들여지기도 한다. 내 경우엔 먼저 종이를 가려 쓰게 되었다. 만년필은 일반 잉크펜에 비해 선이 더 굵게 나오고 쉽게 번지기 때문에 적어도 80g 정도 되는 종이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형광펜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만년필로 쓴 글씨는 아무리 오래 말려도 형광펜이 닿으면 심하게 번지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대안을 찾아보았으나 결국 형광 색연필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형광펜을 쓰지 않더라도 잉크가 마르길 기다리는 것은 귀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찾아보면 그 안에도 즐거움은 있다. 나는 펜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물빛을 좋아한다. 방금 종이에 닿은 잉크는 빛을 받아 반짝이다가 물기가 마르면서 반짝임이 사라진다. 작은 글씨 한 획에도 농담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획이 시작하는 곳은 진하고 끝으로 가면 흐려진다. 일반 펜을 사용할 때는 느껴 본 적 없는 것들이다.
이렇게 만년필은 번거롭기도 하고 필기습관에 제약도 많이 생기지만 이 물건이 오랜 시간동안 나와 관계를 쌓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에 따른 불편을 모두 감수하게 된다. 볼펜을 쓸 때와 만년필을 쓸 때의 필압이 달라지고, 그에 맞게 펜도 길이 들고 서로 적응하면서 이 물건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되어간다. 어린 시절 누구나 동네 문방구에서 똑같은 검정색 제도 샤프를 사서 쓸 때 내 샤프에 이름을 써 놓지 않아도 손에 쥐어보면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만년필은 내가 써본 필기구 중 가장 오래 내 곁에 머문 물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