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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치료일지

열한 번째 진료

요즘은 누워서 잠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물론 매일 잘 자는 것도 아니고 항상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겪어 온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후 2시 무렵에 커피를 마신 뒤 잠을 못 잔 적이 있어서 오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기로 했고 잠자리에서는 가능한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필요하다면 명상도 한다. 그리고 저번 달에 계속 몸이 좋지 않고 낮잠이 늘었던 것이 오로지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비타민제를 사서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다.

 

최근에 내가 싫어했던 사람을 만날 일이 있었다. 당연히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타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연습을 해 보자고 마음을 먹고 나갔다. 그런데 싫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힌 채로 사람을 대하다 보니 그 사람이 싫은 이유를 일부러 만들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정작 그 사람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문득 내가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 감정과 거리를 두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만 집중해 보았다. 그러던 중,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나에게 그 사람이 조심하라고 하면서 "손 다칠까 봐 걱정돼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아주 신선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껏 이런 상황에서 부주의하다는 등의 나를 향한 책망만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당신이 다칠까 봐 내 마음이 걱정스럽다'는 말은 방향이 완전히 반대였다. 나는 싫다고 생각했던 사람으로부터 귀중한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만약 계속해서 싫어하고 마음에 벽을 세운 채 그 사람을 대했다면 저런 말들이 순순히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이 싫었던 이유는 내가 벗어던지고 싶은 나의 모습, 과도하게 노력하는 나와 너무 닮다 못해 나보다 더 심했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며 애쓰다보면 당연히 보상을 바라게 된다. 더 문제는 나처럼 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이 게을러 보이게 되는데, 사실은 내가 과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할 만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문제라는 것을 몰랐던 시절의 나는 남들이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평가해왔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심지어 더 심한 사람을 만나게 되자 마치 거울을 보듯이 나의 모습이 비쳐 보였고, 지금까지 내가 남에게 해 왔던 평가가 거울에 반사되어 나에게 되돌아온 것이었다. '저 사람의 눈에는 내가 게을러 보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할 것 같았고 타인에게 벽을 세우고 나를 괴롭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더 이상 그 사람이 미워 보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대하기 편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 사람의 과도한 노력에 대해서도 '열정이 넘치는 모양이지, 성격이 급한가 봐' 정도로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함부로 남을 평가해 온 것에 대해서는 반성을 했고 나 자신을 괴롭혀왔던 것에서 벗어나 조금 더 균형 잡힌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근황 이야기는 여기까지, 그 다음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여름에 중요한 깨달음을 얻고 우울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아직은 종종 우울감이 올라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번번이 생각나는 사건이 있었다. 그건 아주 뿌리가 깊고,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이 없으며 블로그에도 쓸 생각이 없다. 정신과에 다니면서도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계속해서 반추하게 되고 영향을 받다 보니 더는 이 문제를 덮어 놓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을 만났을 때, 이 벽을 영영 다시 마주칠 일이 없다면 피해도 좋다. 하지만 똑같은 벽을 끊임없이 다시 마주치게 되고, 그 벽에 부딪혀서 다치게 된다면 그땐 벽을 넘어야 한다. 지금까진 이 벽을 넘을 힘도 없고 방법도 몰랐지만 이제는 마주 서서 넘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단번에 넘긴 어렵겠지만 벽 앞에 디딤돌 하나는 놓을 수 있을 것이고 내가 휘청거리면 선생님이 손까진 잡아주지 않더라도 조심하라고 언질은 주지 않을까.

 

여전히 내가 나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남아있나 본데 나는 이번에야말로 병원에서 눈물 쏟는 거 아닌가 싶었다. 눈물은 무슨, 이 힘든 이야기를 하면서도 달변가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막상 입 밖으로 뱉기 시작하니 그렇게 어려울 게 없었다. 물론 병원에 가기 전 선생님께 어떻게 말씀드리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많이 정리해보긴 했지만 말이다. 긴 이야기인지라 선생님은 가능한 내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셨고,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감탄을 하면서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굉장히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 대한 판단도 올바르고 어떻게 그렇게 잘 대처할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고 하셨다. 그리고 결국 과거에 이미 벌어진 사건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그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한 번씩 올라오거나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기도 하겠지만 그때만 다루면 되고 평소에는 현실, 현재를 살아내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한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 해도 이미 벌어진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건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는데"는 사실에 대한 부정이다. 나는 생각이 후자로 기울면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잊을 수 없는 힘든 기억이고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지만 나는 그 또한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의 사건이 남긴 상처는 완전히 없앨 수 없고, 나는 앞으로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는 자신을 바로잡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이상하고 왜곡된 사건을 많이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오랫동안 아파했을지언정 나는 여전히 올곧은 사람이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담 후 며칠 간은 감정의 동요를 겪을 각오를 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상담이 끝난 뒤에 느낀 기분은 유쾌함이었다. 나는 저녁을 잘 먹었고 늘 하던 대로 운동하고 씻고 일기 쓰고 잤다. 딱히 잠을 설치지도 않았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무거운 기분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오랜 시간 동안 상처 받으며 살아왔음에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나의 저력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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