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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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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충족적 예언과 탱자나무 “그럴 줄 알았어.” 예언은 생각보다 잘 들어맞는다. 왜냐하면 처음에 생각한 대로 보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까지 하면 꼼짝 없이 그 예언에 갇히게 된다. 그러니 그럴 줄 알았다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행동하게 된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다. 그래서 꿈을 잘 꿔야 한다. 오래도록 꿈을 꾸면 그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나의 오랜 꿈은 위리안치였다. 유배 중에서도 극형으로 울타리에 탱자나무를 두르고 외부와 단절된 채 홀로 살아가는 것. 내 주변 상황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차라리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왜 몰랐을까, 그건 아이언메이든을 조금 더 키운 것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이언메이든은 고문기구다...
도와주세요 처음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으면서 생각했었다. 자정이 지났구나.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때는 자정이지만 가장 추운 것은 자정을 지난 시각이며, 해가 뜨면서 기온이 다시 올라가게 된다. 상담을 종료한 후 어느 겨울에 계절성 우울을 심각하게 겪은 적이 있었다. 몸을 감싸는 한기가 너무 힘들고 해가 짧고 밤은 길어 수심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러면서도 그걸 해 뜨기 전 새벽의 추위라고 여기며 견뎠다. 그리고 지금은 길었던 밤을 지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나를 괴롭히던 것들로부터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꽤 많이 멀어진 상태다. 그러면서 과거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전, 이 상황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면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스스..
아멜리에: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를 보면 행복해진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의외로 이 영화는 은연중에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금붕어의 자살기도였다. 어린 아멜리네 집에서 키우던 금붕어 '뻐끔이'는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죽고 싶은 인간이 물속으로 뛰어든다면 뻐끔이는 어항 밖으로 펄쩍 뛰어올라 공기 중으로 몸을 던졌다. 바닥에 떨어져 펄떡대던 뻐끔이는 간신히 구조(?)되어 다시 어항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너무 예민한 성격인 엄마는 자살 기도했던 금붕어와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어 집 근처 냇가에 뻐끔이를 풀어주게 된다. 집에서 쓰던 어항도 함께. 마침 냇가에는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빗방울이 수면 위로 동심원을 그렸다. 뻐끔이도 그 물결이 일렁이..
포레스트 검프: 초콜릿 편식하기 인생이란 하나의 초콜릿 박스 같단다. 뭐가 걸릴지 아무도 모르거든. 정말 그럴까? 어떤 초콜릿 상자는 크리스마스 어드밴트 캘린더처럼 뭐가 나올지 모르게 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초콜릿 상자는 열자마자 한눈에 모든 것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원하는 상자를 골라 가질 수 있을까? 또 나에게 주어진 초콜릿은 모두 다 먹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다크 초콜릿을 좋아하는데 내 상자에는 다크 초콜릿은 별로 없고 밀크 초콜릿이 대부분이라면 초콜릿의 색깔을 보고 진한 다크 초콜릿만 골라 먹고 밀크 초콜릿은 남길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까진 취향 문제지만 안전, 심하게는 생사의 문제가 되는 것도 있다. 만약 내가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데 아몬드 초콜릿이나 마카다미아 초콜릿이 주어진다면? 동그랗고 맨질맨질한..
밀푀유와 천 개의 말들 먼저 밀가루를 체에 쳐서 준비한다. 그리고 물과 녹인 버터를 넣고 반죽한다. 한 덩어리가 되면 잠시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꺼낸다. 이제 숙성된 반죽 안에 차가운 버터를 넣고 잘 감싸준다. 밀대로 반죽을 길고 얇게 밀어주고 접어서 다시 밀기를 몇 차례 반복한다. 또 반죽을 숙성시키고 다시 밀대로 밀고 접어준 다음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반죽이 과하게 부풀지 않도록 포크로 구멍을 내 주면 오븐에 들어갈 준비가 끝났다. 뜨거운 열기에 반죽이 부풀고 군데군데 작게 자리했던 버터가 녹아 나와 공기로 채워지면서 반죽의 켜가 살아난다. 파사삭! 소리를 내는 밀푀유 완성. 밀가루가 생각과 감정이라면 버터는 그것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법이다. 밀가루를 체에 치는 것은 생각과 감정을 가지런히 고르는 과정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행복에 대하여 에 등장하는 패트로누스 주문은 행복하고 강렬한 기억을 힘으로 삼아 나를 지켜줄 존재를 불러오는 주문이다. 나는 그런 존재를 부를 수 있을까? 루핀 교수가 해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더욱 강렬한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말할 때 나는 언제를 떠올려야 할까?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던져보았지만 답이 나왔던 적은 없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없다. 정말 좋았다고 회상할만한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가장 크게 다가왔을 때는 무계획을 계획 삼아 방바닥과 혼연일체 되어 시간을 보내던 그때였다. 행복했던 기억도 돌아가고 싶은 추억도 알 수가 없다니, 그럼 나는 언제부터 우울했었던 걸까?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도 시작점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거슬러 올라간 시간만큼의 ..
『멋진 신세계』: 소마와 압력 정신과의 문턱을 넘기 전 여러 정보들을 모으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이렇다. "정신과에 갔을 때 의사가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면 실망한다, 정신과는 약을 처방받는 곳이고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말했고 적어도 내 주변에는 병원에서 약물처방 없이 상담만 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약을 주지 않아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한편 주변에서 약물치료를 받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엔 약을 먹기는 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수용하고 스스로를 바꾸려는 노력은 거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의 병은 환자가 스스로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자아성찰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 부분에서 개선이 안 된다..
감정은 언제나 옳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예민한 것일 수 있다. 혹은 남들이 너무 둔감해서 상대적으로 내가 예민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예민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관건은 예민하게 느낀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느냐이다. "내가 이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게 이상한 걸까?" 화도 내야만 하는 때가 있지만 '이 상황'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는 화를 내는 게 이상할 수도 있다. 혹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해도 바람직한 방법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화가 나 있다는 뜻이다. 화가 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화를 표출하는 때와 방법은 고민이 필요하다. 때때로 이렇게 자기 감정에 대해 타인의 확인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자신의 감정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쌓지 못한 경우..
먹는 것과 나를 돌보는 연습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정신도 건강하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배워서 만들어 먹거나 맛집탐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혼자 먹을 때도 대충 먹는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다.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 이렇게 말했더니 선생님도 맞는 말이라고 했던 게 생각난다. 상담은 종료되었지만 나의 치료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치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돌보는 연습인데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걸 아주 잘 한다. 반면 나는 그렇지 않았다. 끼니를 거르는 때가 아주 많아서 건강이 상했고 요리는 싫어했다. 먹는 게 귀찮고 싫은데 그걸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게 좋을 수가 없었다. 배고픔을 무시하다 못해 몸이 배고프다는 신호조..
인사이드 르윈: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은 시작과 끝이 같다. 이는 결말을 먼저 보여준 다음에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똑같은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르윈의 삶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는데 나는 후자가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가스등 카페에서 노래하는 무명가수 르윈 데이비스, 추운 겨울에 코트 하나 없고 거처도 마땅치 않아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소파 신세를 진다. 함께 노래하며 레코드를 냈던 친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혼자서 낸 레코드 역시 재고 신세다. 심지어 커플 진과 짐의 집에서 종종 신세를 지면서 진과 잠자리를 한 뒤 임신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나마 없는 돈을 쥐어짜내 진의 중절수술 비용을 대는 것이 르윈이 보여주는 최대한의 성의이지만 병원 예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