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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도와주세요

처음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으면서 생각했었다. 자정이 지났구나.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때는 자정이지만 가장 추운 것은 자정을 지난 시각이며, 해가 뜨면서 기온이 다시 올라가게 된다. 상담을 종료한 후 어느 겨울에 계절성 우울을 심각하게 겪은 적이 있었다. 몸을 감싸는 한기가 너무 힘들고 해가 짧고 밤은 길어 수심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러면서도 그걸 해 뜨기 전 새벽의 추위라고 여기며 견뎠다.
 
그리고 지금은 길었던 밤을 지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나를 괴롭히던 것들로부터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꽤 많이 멀어진 상태다. 그러면서 과거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전, 이 상황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면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스스로를 구원해야지 누군가 구해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아야만 했을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주변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음에도 내가 도움을 받는 경우는 잘 없었다. 그러니 늘 사람들에게 잘 하려고 노력하다 이내 지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고 언제부턴가는 나도 도움의 손길을 거두게 되면서 인간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런데 문득 사람들이 나를 돕지 않은 것은 내가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왜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첫째, 도와달라고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둘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서. 셋째, 도움을 받기는커녕 약점만 잡힐 것 같아서. 이 정도가 내가 생각해 본 이유다.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나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을 거다. 그러나 이 생각들은 진심으로 나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마저 나에게 다가올 수 없게 했다. 내가 나를 고립시켰던 거다. 그리고 어쩌면 내 곁의 사람들마저 외롭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도 나를 도와줬던 사람이 있었다. 내 문제를 마주하고 나를 괴롭히던 상황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노력하던 나를 정서적으로 지지해줬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고 해도 그렇게 모든 것을 홀로 그러안고 살 필요는 없다.
 
나의 유약함을 인정하는 건 어렵다. 그렇지만 필요한 일이고,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다. 마치 이제 막 탈피한 가재가 되는 것 같은 일이다. 이제는 나를 지켜주기보다는 속박하는 것이 되어버린 오래 된 껍질을 벗고 나면 새 껍질은 아기 손톱처럼 연약하다. 바로 그럴 때 말하는 거다.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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