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의 문턱을 넘기 전 여러 정보들을 모으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이렇다. "정신과에 갔을 때 의사가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면 실망한다, 정신과는 약을 처방받는 곳이고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말했고 적어도 내 주변에는 병원에서 약물처방 없이 상담만 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약을 주지 않아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한편 주변에서 약물치료를 받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엔 약을 먹기는 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수용하고 스스로를 바꾸려는 노력은 거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의 병은 환자가 스스로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자아성찰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 부분에서 개선이 안 된다. 물론 뇌의 문제로 인해 마음이 아프게 된 사람들은 있다. 그 경우에는 약물이 필수적이고 도움도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약물이 해결책의 전부는 아니다. 오로지 약물치료가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 약은 소마다.
"마음이 내킬 때는 언제나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으며 돌아올 때에도 골치 아프거나 신화에 사로잡히지도 않는 약이지."
소마는 소설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약물이다. 그 약은 "행복감을 주고 마취시키며 유쾌한 환각증세를 일으키는" 약으로, "기독교와 술의 장점이란 장점은 모두 포함한 것"이자 "결점은 모두 배제한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그 무엇이든, 그로부터 도피하고 싶다면 소마를 먹으면 된다. 술이나 마약이 가져다주는 부작용 같은 것은 없으며 종교적인 고행이나 참회를 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즐거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골몰할 필요도 없으며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구시대의 악습일 뿐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늙지 않고 젊은 육체를 유지하기 때문에 나이가 많아도 은퇴하지 않으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도 않는다. 특히 알파 계급에게는 일을 할 때는 어른이지만 감정적으로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해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내용은 어릴 때부터 수면 중에 시행하는 조건반사적인 암시 교육을 통해 주입되어 그들은 평생 앵무새처럼 그 내용을 읊으며 살게 된다.
그럼에도 "문명세계"에 사는 이들은 의외로 우울증이라는 말을 알고 있다. 다만 "일 세제곱센티미터가 열 가지 우울증을 치료한다"는 말만 주워섬기며 소마를 권할 뿐 우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우울이란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엉켜버린 거대한 실뭉치 속에 숨어있는 몇 가닥 정도에 불과하다. 그들은 실뭉치를 풀어보려고 시도한 적이 없고, 대신 소마를 먹음으로써 실뭉치를 보이지 않는 곳에 내팽개친다. 그러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라는 것은 대체 뭘까?
그러면 이 세계에서 소마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온전히 감당해본 적이 없다. 다양한 감정의 층위를 세심한 어휘로 살펴본 적도 없고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다. 때문에 소마가 없는 야만세계에 떨어진 린다는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고 다음날 잠에서 깨면 수치감에 괴로워하면서 또다시 술을 마신다. 그런 린다에게 문명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소마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했다. 그는 드디어 부작용 없는 소마를 만났지만 약기운에서 깨어난 잠깐의 틈조차 참을 수 없어 끊임없는 소마 휴일에 빠져들어 스스로를 망가뜨린다.
한편 문명세계에도 자신의 의지로 소마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인간이 병 속에서 균일하게 생산되는 이 세상에서 보기드물게 자의식이 충만한 사람들이다. 버나드의 경우는 여타의 알파 계급에 비해 열등한 신체조건 때문에, 헬름홀츠는 뛰어난 지성 때문에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헬름홀츠의 경우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외적인 차이를 타고난 버나드는 헬름홀츠보다 빨리 타인과 구별되는 '나'를 알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조건반사적인 교육으로 노예화되지 않았을 때를 가정하게 되었다. 특히 "노예화"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수면시 주입된 내용들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용했던 것과 달리 버나드는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상상력은 삶을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
버나드는 "나는 그냥 나대로 있고 싶습니다. 울적한 나대로가 좋습니다.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타인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소마를 거부하는데 이는 타인의 감정과는 구분되는 자신만의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만인은 만인의 소유"라는 주입받은 말을 어떤 비판도 없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자기멸각(自己滅却)"을 위해 건배하는 자들과 달리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나와 타인의 차이를 알고 경계를 설정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아를 확립한다. 대부분의 알파 계급이 어린아이와 같은 감정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이런 차이와 경계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과 다른 감정을 갖지도 않고 갖는다 하더라도 인식하려 들지 않으며 불편하면 소마로 도망쳐버리는 이들이 성숙한 자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울은 '나'의 우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직면하고 견뎌낼 힘을 길러야 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지는 압력을 회피하지 않고 견뎌낸 사람들은 그 압력만큼 성숙한 인격을 갖게 된다. 지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모든 면에서 언제나 어른이 되고자 한 버나드처럼.
소마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내적인 힘에 의존한 채 어떤 크나큰 시련이나 고통이나 어떤 박해에 직면한다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버나드는 전에 여러번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고통을 동경한 적이 있었다.
버나드의 이런 시도는 처음부터 잘 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버나드가 행복이란 불쾌한 감각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음을 알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행복은 앎이다. 레니나와 버나드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레니나는 그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소마를 여섯 알이나 삼키고 침대에 누워 현실을 벗어났지만 버나드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명상을 했던 일화는 그런 차이를 잘 보여준다. 한편 처음부터 소마라는 건 없는 세상에서 살아온 야만인 존은 문명세계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소마가 가져다주는 행복감이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자아를 확립하고 기만적인 행복보다는 자유로운 불행을 추구하게 된 레너드와 헬름홀츠는 지나치게 인간다운 자들이라는 이유로 문명세계 밖으로 추방되는 것을 선택했고, 야만인 존은 문명의 기만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약물을 처방하면서도 동시에 약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약은 아침에 침대에서 벗어나 출근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밤에는 잠을 잘 수 있게 해 주고, 자·타해, 또는 자살과 같은 급한 불을 꺼줄 뿐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부과된 압력을 스스로 견뎌내고 마침내는 나를 누르는 것을 내 힘으로 되받아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게 약의 역할 아닐까. 벌어놓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을 할 것인지는 저마다 다르다. 내 경우는 주로 공부와 명상을 했고, 예술과 유머를 활용해 건강한 방식의 승화를 시도하거나 운동을 통해 체력을 기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또 혹자는 자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환경으로부터 사력을 다해 도망칠 수도 있겠다. 문제의 근원이 뇌에 있든 환경에 있든 모든 것은 이어져 있기 때문에 둘 중 어떤 것이든 바꾸려고 노력하면 서로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 약물치료, 상담, 신체건강 개선, 생활습관 교정 등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얼마나 작은 일이든 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 무언가를 하는 동안 깨어 있어야 한다.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푀유와 천 개의 말들 (0) | 2022.01.28 |
---|---|
행복에 대하여 (0) | 2021.08.16 |
감정은 언제나 옳다 (0) | 2021.03.05 |
먹는 것과 나를 돌보는 연습 (0) | 2021.02.16 |
인사이드 르윈: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0) | 2021.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