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서 죽어라"
요즘도 이런 말을 할까? 아마 코로나 때문에 안 할 것이다. 요즘은 몸이 아프면 학교나 직장에 가지 말고 꼭 쉬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병원이나 보건소로 가서 필요한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아파도 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은 우리 집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등교는 제시간에 해야만 한다고 믿는 어른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게 배운 아이들은 아플 때도 학교에서 버텨야만 성실한 학생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조퇴는커녕 양호실 침대에 누워있는 것조차 웬만큼 아프지 않고서는 쉽지 않았고, 그 많은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 고작 두 개 뿐인 침대는 늘 비어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된다. 아프면 휴식을 취하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를 위해서는 일상도 잠시 멈춰야만 할 때가 있다. 골골대면서 학교에 가서 일주일간 수업을 받는 것과 사흘 쉬고 나흘째에는 건강한 몸으로 학교에 가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나을까? 나흘째에도 건강해지지 않는다면? 그건 진짜 아픈거니까 더더욱 쉬어야 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을 위해서도 아픈 사람은 쉬는 편이 낫다. 특히 초등학생들은 아직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에 감기도 학급 한 바퀴를 거의 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아폴로 눈병이나 인플루엔자 정도 되는 사유가 아니면 질병으로 인한 공결로 인정받는 일이 드물었다. 심지어 눈병에 걸린 아이들도 교실 내에서 자리만 한 구석으로 몰아 앉히는 것으로 끝냈던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전염병은 더 쉽게 확산되었다.
이 당연한 것이 이뤄지지 않는 환경에서 나는 점점 아프다는 말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약간의 두통이나 감기 정도는 말해봤자 "죽어도 학교 가서 죽으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고 이에 익숙해진 나는 아픈 것을 참고 수업을 듣는 것이 당연하고 칭찬받을 일인 줄 알았다. 여기까진 그렇다 치고, 진짜 문제는 내가 나의 아픔을 알아채고 돌볼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아파야만 학교를 쉴 수 있을까? 얼마나 아프면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야 할까? 그런 것을 잘 모른 채로 성인이 된 나는 수업시간 내내 코 푼 휴지로 탑을 쌓아도 병원에 가지 않았고, 얼굴이 퉁퉁 붓고 열이 올라도 출근을 했다. 그리고 만성적인 우울증과 무기력감에 자살사고가 있었어도 정신과 문턱을 넘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그 수 년 동안 내가 이런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을 했겠는가? 나도 내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잘 몰랐을뿐더러 우울이라는 겉으로 티도 안 나는 어려움을 토로한들 사람들이 들어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나의 아픔이라는 주관적인 감각에 대한 확신이 흐려진 자리는 객관적인 생각과 사실관계 파악으로 채워졌다. 때문에 정신과 상담을 다니면서도 내 감정에 대해 얘기해보라고 하면 횡설수설하다가 화제를 돌려버리는 게 아닐까.
아프면 쉬어야 한다. 필요하면 치료도 받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 그러려면 내가 아픈 줄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중엔 아파도 아픈 줄 모르게 된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그렇게 아픔에 무뎌진 나의 의식에 경고가 필요할 때 내 몸은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듯이 격렬하게 아파야만 했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미리 알고 대처했다면 가볍게 끝났을 수도 있는 것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것들은 나도 모르는 새 쌓이고 쌓여서 결국 나에게 돌아왔다. 이번에도 무시하거나 혼자 참는다면 다음엔 또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 이런 경험을 더는 반복할 수 없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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