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 축축하게 젖은 문을 열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코로나 때문에 진료 시작 전에 병원 곳곳을 소독하는 모양인데 나는 소독약이 마르기도 전에 온 것이다. 아직 간호사들은 출근조차 하지 않은 시간이라 병원에는 의사와 나뿐이었다. 그때 진료예약을 잡아 준 것은 아마 선생님이 출근을 앞당겨가며 내 편의를 봐주신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는 심리검사를 토대로 상담을 하게 됐다. 20분 정도 하려나 했는데 생각보다 나에게 할애된 시간이 길었다. 병원마다 의사마다 치료방침에 차이가 있겠지만 거의 약만 처방받으러 가는 곳도 있다던데, 내가 간 병원은 상담에 공을 들이는 편인가보다. 나에게는 이 편이 잘 맞지 않을까.
먼저 심리검사에 대한 분석을 들었다. 만성적인 우울, 불안, 스트레스가 있고 무기력하며 건강에 대한 불편감 내지는 건강염려증이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민하고 내향적이며 자살사고가 보였다. 이에 대해서는 전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내가 이렇게나 힘들어하는 주요 원인이 있는데 그걸 블로그에서 공개로 쓸 일이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그럴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으니 그냥 뭉뚱그리고 어물쩍 넘어가겠다. 어쨌든 그 원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또한 검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검사지의 질문에 잘 응답했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신뢰도 또한 높은 편이라고 하셨다.
그다음 상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초진 때 보여드리려고 써 놓은 것과 초진 후의 생각을 써 놓은 것을 전해 드렸다. 그건 나중에 읽어보기로 하고, 정해진 시간 동안 상담을 시작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머뭇댄 시간은 길지 않았고 두서없더라도 생각나는 것부터 이것저것 늘어놓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 말에 개입하는 일은 잘 없었고 계속 들으면서 몇 가지를 메모하고 때로는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정도 쏟아 놓았을 때 선생님은 차분히 이에 대한 피드백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그간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다고 했는데, 이건 세상에서 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세상은 인생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력서의 빈칸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빈둥대며 쉬었다 한들 머릿속은 복잡하고 마음은 분주했을지, 그 과정에서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그 시간이 개인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할지 남들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시간을 증명해 줄 표딱지 같은 게 있어야만 떳떳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의 "열심히 살아왔다"는 말은 나의 말만 듣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약물 처방은 없었다. 뇌 자체의 기능 문제로 불편을 호소하는 것이 아닌 데다가, 불안 또는 민감성을 약물로 조절할 수도 있겠으나 아직은 더 지켜보면서 나의 상태를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나의 꿈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난 꿈을 많이 꾸기는 하지만 잠에서 깨면 금방 잊어버리는 편이다. 특별히 반복되는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딱히 답할 말이 없었다. 다음 진료 때까지는 일어나자마자 대강이라도 생각나는 것을 메모를 해 놓아야겠다. 수납을 하고 보니 거의 1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