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치료일지를 쓰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생기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약을 먹지 않기 때문에 약물에 의한 변화 같은 것은 쓸 게 없다. 오로지 상담만 하고 있다 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글로 풀어내기가 쉽지 않은데 그걸 여기에 쓰고 싶지가 않은 게 문제다. 그래도 여전히 그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으니 두루뭉술 넘어가 보겠다.
요즘은 일상생활에서 크게 불편한 부분은 없다. 내가 처한 환경이 그리 좋지 않다보니 힘들기는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알고 있고 그게 내 잘못이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기 때문에 밑도 끝도 없는 우울의 늪으로 빠지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괴로움을 내가 붙잡고 있었지만 이제는 괴로운 순간이 지나면 그 괴로움도 보내준다. 그리고 예전엔 잘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위한 투자도 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의자를 바꾸는 일이다.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아주 많은데 저렴하고 썩 좋지 않은 의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바퀴 달린 오피스 의자는 괜찮은 것을 사려면 못해도 10만 원대는 각오를 해야 하는데 나를 위해서 그 정도의 투자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자 값을 지불해서 척추 건강을 지키고 정형외과에 들어갈 돈을 줄일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소비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새 의자를 들였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상담시간 막바지에 꺼낸 이야기가 뭔가 중요했던 것 같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차트에 별표까지 그려 넣으면서 이제야 알겠다고 하셨다. 시시비비를 정확히 알고 있는데 왜 그럴까 했는데 이유를 찾으셨다고 한다. 마지막에 선생님이 드디어 중간 결론을 내셨다. 약물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아니라 상담 치료가 필요한 것이 맞다고 더욱 확신을 담아 말씀하셨다. 나는 초반에 상담만 진행하기로 가닥 잡으신 줄 알았는데 두 달 동안 숙고하고 계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상담 중에 내가 손거스러미를 뜯었다. 지난번 상담 때는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내가 그 행동을 의식하고도 멈추지 못했다. 이건 보통 무언가 불안하고 손에 잡히지 않을 때 하는 행동인데 왜 그랬을까? 처음 한두 번 진료 때는 정신과가 낯선 공간이라 어려워한 적은 있어도 그 후로는 병원에서 긴장하지도 않았고 가기 싫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는데. 뭔가 내가 의식하지 못한 불편함이 있지 않았을까. 다음 상담 때도 이 이야기를 이어서 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손톱 주변에 각질이 일어나지 않아서 뜯으려고 해도 뜯을 게 없도록 보습 관리를 해야겠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생각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알고는 있었지만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던 것들이 끼워 맞춰지면서 여러 가지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그중에는 인생의 자산이 될 만한 깨달음도 있지만 부정적인 감정들도 많이 있다. 진작에 밖으로 꺼냈어야 하는 감정들과 내가 인식하지 못한, 혹은 알고도 덮은 나의 상처가 이제야 드러나고 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 상황에 처한 나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후자였는데. 이제는 안다. 아무리 상황이 열악했어도 그 속에서 내가 상처 받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 정도로 열악하게 대응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다르다. 그게 바로 인간의 의지일텐데, 안타깝게도 내 경우엔 그 의지가 올바르게 사용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당연히 믿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상황에 처한 내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를, 적어도 나의 의지만은 믿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