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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치료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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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진료 블로그에 치료일지를 쓰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생기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약을 먹지 않기 때문에 약물에 의한 변화 같은 것은 쓸 게 없다. 오로지 상담만 하고 있다 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글로 풀어내기가 쉽지 않은데 그걸 여기에 쓰고 싶지가 않은 게 문제다. 그래도 여전히 그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으니 두루뭉술 넘어가 보겠다. 요즘은 일상생활에서 크게 불편한 부분은 없다. 내가 처한 환경이 그리 좋지 않다보니 힘들기는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알고 있고 그게 내 잘못이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기 때문에 밑도 끝도 없는 우울의 늪으로 빠지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괴로움을 내가 붙잡고 있었지만 이제는 괴로운 순간이 지나면 그 괴로움도 보내준다. 그리고 예전엔 잘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위한 투자..
여섯 번째 진료 진료실에 들어가 앉으면 일주일 간의 근황 이야기부터 하게 된다. 요즘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잘 조절하면서 살고 있다. 잠을 설쳐도 새벽에 깨면 깼나 보다, 또 자야지, 아침에 눈이 안 떠지면 그런가 보다, 그럴만하니까 안 떠지겠지 하며 지낸다. 소음 때문에 숙면에 방해가 되는 것 같으면 귀마개를 끼고 자면 된다. 그래서인지 잠이 얕아도, 꿈을 많이 꾸는 날이 있어도 별로 신경이 안 쓰인다. 그리고 전부터 공부하려고 했던 게 있는데,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면서 선뜻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씩 하게 되었다. 많이 하지도 못하고 잘하지도 못하지만 아예 하지 못했던 때에 비하면 요즘이 훨씬 나으려니 하고 있다. 며칠 전, 집에 혼자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보나마나 경비실에서 택배 ..
다섯 번째 진료 병원의 여름휴가 기간이 끝나고 2주 만에 상담을 받았다. 상담예약이 없었던 지난주에 우울한 기분이 올라와서 빨리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터라 상담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첫 진료를 받기 전까지는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상담을 시작한 뒤로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 우울감이 들었던 날, 나는 아침 해가 뜨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보통 이런 때는 몸은 누워있지만 머릿속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쉬지도 못한다. 물론 요즘 평생에 걸쳐 눌러왔던 기억과 감정이 올라오고 있기 때문에 늘 마음이 분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지난달이 더 심했다. 미열이 나는 것 같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여서 적극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필요하면 낮잠도 잤다. 그런 것도 한..
네 번째 진료 이제 어느 정도 내 상황에 대한 파악이 끝났고, 조금씩 깊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선생님이 그에 대한 내 생각, 감정을 끊임없이 물어봤다. 하지만 뭔가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은 채 헤매다가 상담시간이 끝나버렸다. 감정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깨달았지만 실제 나의 삶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일까? 병원 문을 나서고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봤다. '그럼 뭐 어쩌라고?' 아, 이게 내 감정의 정체였다. 나도 답답하고 짜증 나는데 머리로 생각한 행동을 했다. 이렇게 하는 게 옳은 것이고 상황에 맞는 반응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했지만 사실 내 마음은 그렇게 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내가 내 감정을 제대로 알아..
세 번째 진료 병원에 갈 때는 텀블러에 물을 준비해야 한다. 말을 많이 하게 되니까. 사람들은 정신과에서 상담할 때 우는 경우도 많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던데, 나는 일단 뱉기 시작하면 참 잘도 한다. 꼭 정신과가 아니더라도 병원은 아프고 힘든 이야기 하러 가는 곳이라 마음이 편한 장소는 아닌데도 말이다. 이 블로그 첫 번째 글에 나는 내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고 썼는데 그렇지만도 않은가? 그래도 말을 하다 보면 감정의 동요는 일어나서 목소리가 흔들리고 속에서 울컥울컥 하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내가 괴롭고 슬퍼서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돌봐주지 못하고 내 편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반응이고, 그간 제 때 해결하지 못했던 해묵은 감정들..
두 번째 진료 9시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 축축하게 젖은 문을 열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코로나 때문에 진료 시작 전에 병원 곳곳을 소독하는 모양인데 나는 소독약이 마르기도 전에 온 것이다. 아직 간호사들은 출근조차 하지 않은 시간이라 병원에는 의사와 나뿐이었다. 그때 진료예약을 잡아 준 것은 아마 선생님이 출근을 앞당겨가며 내 편의를 봐주신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는 심리검사를 토대로 상담을 하게 됐다. 20분 정도 하려나 했는데 생각보다 나에게 할애된 시간이 길었다. 병원마다 의사마다 치료방침에 차이가 있겠지만 거의 약만 처방받으러 가는 곳도 있다던데, 내가 간 병원은 상담에 공을 들이는 편인가보다. 나에게는 이 편이 잘 맞지 않을까. 먼저 심리검사에 대한 분석을 들었다. 만성적인 우울, 불안, 스트레스가 있고..
첫 번째 진료 병원 대기실의 모습은 정신과나 다른 병원이나 그리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인지 진료실에 들어가서도 생각보다 많이 긴장하지도 않았고 말만 잘했다. 선생님은 내가 뇌 자체의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것 같지는 않고 환경과 스트레스 등이 문제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최근 몇 년 동안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뇌에 문제가 있었다면 해내지 못할 일들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약물을 쓰기보다는 심리검사를 토대로 상담을 해 본 뒤에 치료계획을 잡아 나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 귀에 꽂힌 말은 "너무 잘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첫 진료 때 말을 잘 못할까 봐 미리 할 말들을 적어 놓았다. 정작 병원에 갈 때는 잊어버리고 안 가져갔지만 그게 A4용지로 3장이나 되었으니까 정말 열심..
진료예약 정신과에 전화해 예약을 잡았다. 아, 초진 비용이 어느 정도 나오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잊어버렸다. 그냥 가야지. 병원을 고른 기준은 오로지 거리 하나다. 혹시라도 급히 병원으로 달려갈 일이 생기거나, 병원에 가는 날인데 무기력해서 힘들 때 병원이 멀기까지 하면 가기 어려울 테니까. 가 보고 영 안 맞으면 조금씩 먼 병원으로 옮겨 봐야겠지만 일단은 제일 가까운 곳이 좋다.
시작 나는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다는 건 아니고, 입을 잘 안 연다. 그래서 이 블로그에 무슨 글을 어디까지 적을 수 있을지, 적으면 공개로 올려놓기는 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만 보는 비밀 일기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써 보려고 한다. 이번에야말로 정신과에 가 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과연 병원에서 "이제 그만 오셔도 되겠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다니기는 할까? 그건 모르겠다. 어쨌든 곧 병원에 연락해 예약을 잡을 것이고, 초진 후에 본격적으로 기록을 시작할 예정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여정을 돌아보고 싶을 때를 위해 나의 치료 과정을 담은 일지를 만들고자 한다. 말하자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준비하는 거다. 그..